아름다운 만남

오랜 시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어온 아름다운 의료 나눔

라파엘나눔재단
안규리 이사장

지난 2021년 서울대학교병원 신장내과 의료진은 국내 만성콩팥병 환자 연구를 집대성한 정책연구 보고서를 출간했다. 대규모 국내 환자 코호트를 장기간 추적해 한국형 만성콩팥병 치료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이 보고서를 위해 안규리 교수를 비롯한 연구팀이 10년간 노력을 쏟아부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교수 재직 시절에는 유전성 신장질환, 장기이식, 면역학 분야에서 연구와 임상의 리더로서, 은퇴 후에는 국립중앙의료원 신장내과 의사이자 나눔을 실천하는 라파엘나눔재단 이사장으로서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안규리 이사장을 만났다.

편집실 / 사진 송인호

‘내과 첫 여교수’에게 부여된 무게,
그리고 자부심

안규리 이사장은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신장내과 교수를 거쳐 지난 2020년 정년퇴직후부터 국립중앙의료원 신장내과에 근무하면서 ‘상염색체우성다낭신’이라는 유전성 신장병을 가진 환자와 가족을 돌보고 있다. 안 이사장은 응급실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뱀에 물리거나 탄산가스중독, 분만 후 출혈, 가을철 발생하는 한국형 출혈열이라는 질환에 의해 급성신부전이 발생한 환자들의 의학적 상황을 시시각각 분석하며 치료해서 살려내는 과정이 보람 있었다고 한다. 이후 내과 전문의로 근무하며 대부분의 신장병 환자가 급성보다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며, 전신질환인 데다가 병의 기전도 면역처럼 다양한 원인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인간 질병을 폭넓게 이해하면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다 싶어 신장내과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자 여전히 도전하고 배워가는 중이다. 의사 본연의 임무 외에도 지난 1997년 이주노동자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라파엘클리닉을 설립했고, 올 4월부터는 라파엘나눔재단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안규리 이사장은 우리나라 내과에서 처음 배출한 여성 교수다. ‘최초’라는 수식어는 안 이사장에게 자부심이자, 어깨를 누르는 묵직한 책임감이기도 했다.

“국내 내과 첫 여교수라는 자리가 참 녹록지 않더군요.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 분위기가 보수적이어서 ‘여성이 내과를 간다고?’ 이런 인식들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젠더 불평등(gender inequality)을 겪어야 했고, 진단을 내리거나 치료법을 선택할 때도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컸어요. 여성 전공의로서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기준을 너무 높게 잡았던 거죠.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시절을 혼자 이겨내며 기회가 되면 후배들에게 여성 커리어에 대한 멘토링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의사로서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있으려면 방대한 지식이 필요했고, 의과학이 임상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시기였기에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안 이사장은 강의 준비를 열심히하고 슬라이드도 정말 열심히 만들었던 덕분에 그때 만든 PPT를 지금도 후배들이 사용하고 있다며 웃는다.

인생에서 이루지 못했던 숙제, ‘나눔’

안규리 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라파엘나눔은 지속가능한 의료 나눔을 위해 설립한 재단으로, 의료 소외계층 해소와 인종과 국적을 뛰어넘는 인도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치유 천사 ‘라파엘’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1997년 파키스탄 노동자 두 명과 만나면서 시작됐다.

“당시 내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톨릭교수회 일을 돕고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중인 파키스탄 이주노동자들을 한번 만나봐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척박한 현실을 알게 되었어요. 의료 사각지대에서 약 한번 제대로 먹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할수있는 방법으로 도와드리자는 생각에 이주노동자 를 위한 무료 진료소인 라파엘클리닉을 열었습니다. 서울대학교병원 김전 교수님과 학생 4명으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따스한 마음을 가진 많은 봉사자와 후원자들이 찾아주셔서 2005년부터는 다문화 가족을 대상으로 진료 활동을 확대했습니다. 지금은 동두천과 천안에서도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여러 단체와 협력해나가고 있습니다.”

이후 라파엘인터내셔널을 설립해 몽골, 미얀마, 필리핀, 방글라데시, 네팔, 부르키나파소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의료인들의 역량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5년에는 재단법인 라파엘나눔을 발족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수술비 지원을 시작으로 국내외 의료 지원에 힘을 보태고 있다.

“라파엘클리닉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보따리를 싸자’는 마음으로 진료를 시작했어요. 저는 내과 의사니까 학생들과 함께 내과 진료를 하려고 생각했는데 동료 의사들, 선배들, 동아리 회원들이 오셔서 17개 진료과를 갖춘 조직이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길거리 진료를 해온 우리를 서울대교구 염수정 추기경님이 보시고 성북동 삼선교 사거리에 있는 건물하나를 마련해주셔서 안정적인 공간에서 진료도 하고 해외 사업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진료에 힘을 보태준 의료진, 보잘것없는 진료소를 위해 책상을 내어주신 신부님, 먹을 것을 가지고 오셔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민들 등 안규리 이사장은 많은 분의 도움 덕분에 라파엘클리닉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며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아름다운 나눔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사회를 꿈꾸며

안규리 이사장은 라파엘나눔을 이야기할 때 흰개미를 예로 든다. 미얀마 바간에서 목격한 크고 웅장한 흰개미 탑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까닭이다.

“흰개미가 만든 탑은 가우디 건축물과 많이 닮았습니다. 작은 흰개미가 지었다고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아름다워요. 흰개미는 그저 자신이 들 수 있는 모래 한 덩어리를 올려놓았을 뿐인데 가우디 건축물만큼 멋진 탑이 완성되었어요. 라파엘나눔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기에 지금의 구조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가우디처럼 위대한 건축가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 는 환경을 만들어드리는 것이 라파엘나눔이 꿈꾸는 미래이기도 해요.”

의사라는 사회적 책무에서 시작한 나눔이 이제 안규리 이사장에게는 평생 실천해야 하는 아름다운 숙제가 되었다. 나눔도 배워야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3년 전부터 안 이사장은 시니어 아카데미를 개설해 인생 2막에 의료 나눔을 꿈꾸는 시니어 의료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업무 특성상 어렵고 복잡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잖아요. 다양한 의견이 모이는 최일선에 계시다 보니 해결할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많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노고에 감사드리고, 〈건강을 가꾸는 사람들〉이라는 매체 이름처럼 자신의 건강을 가꾸는 데도 시간을 할애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챙기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대학교수 시절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완벽주의자’였던 것 같다는 안규리 이사장은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학생들이 의사로 성장하는 시기에 좋은 친구, 힘들 때 믿을 만한 지지자가 되어주고 싶단다. 말은 이렇게 해도 지난 26년 동안 함께 무료 진료를 해온 학생들이 여전히 안규리 이사장 곁을 지키고 있다. 그들과의 우정은 자신을 의사의 길로 이끈 초심으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는 크고 작은 봉사단체가 많지만, 라파엘나눔처럼 전 구성원이 26년 동안 변함없는 의지와 열정으로 마음을 모으기란 쉽지 않다. 안규리 이사장이 앞으로 펼쳐 보일 행보를 응원하며 바라는 대로 아름다운 나눔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가 되길 기원한다.